[서호정] 테크니컬 디렉터의 시대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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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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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정 기자 = K리그는 2026년부터 각 팀별로 테크니컬 디렉터(Technical Director)를 의무화한다. 성인, 유스 단계의 기술 발전과 시스템 구축, 선수 영입을 주도하는 역할이다. 현재 K리그는 단장(General Manager)이 그 역할을 총괄적으로 가져가는 분위기였는데, 더 확실한 정체성을 지닌 역할을 만들겠다는 취지다.

프로축구연맹은 테크니컬 디렉터 의무화를 통해 장기적 관점과 일관성이 있는 선수 육성, 영입이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테크니컬 디렉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 같은 정책의 도입을 이끈 박태하 기술위원장은 "경영진이 자주 바뀔 수밖에 없는 K리그 구조에서 기술 파트는 긴 시야를 갖고 흔들리지 않고 가야 한다. 그래야 구단의 철학과 정책이 산다"고 말했다. 지난해 대한축구협회 주관으로 테크니컬 디렉터 코스가 열렸고 행정가, 지도자로 일하는 많은 축구인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최근 감독 이상으로 영향력 있는 테크니컬 디렉터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루이스 캄포스(PSG)가 대표적이다. 모나코에서 음바페, 하메스 로드리게스, 파비뉴 등을 영입, 발굴해 주목받았던 그는 릴OSC로 가서 PSG의 독주를 막아섰다. 당시 릴에서 좋은 호흡을 맞춘 크리스토프 갈티에 감독과 함께 이번 시즌부터 PSG에 부임했고 팀의 큰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위르겐 클롭 감독과 함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부활을 이끈 미하엘 초르크, 세비야를 유망한 선수를 발굴해 비싸게 파는 '거상'으로 만든 몬치 역시 유명하다. 랄프 랑닉처럼 감독과 디렉터를 오가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케이스도 있다. 이들은 선수 혹은 지도자 경험을 바탕으로 일반 경영인이 접근하기 힘든 영역에서 안목과 식견을 발휘한다. 경영자와 감독 사이의 영역에 위치하는 '실세'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K리그의 테크니컬 디렉터 도입 취지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K리그의 경우 선수 영입에 대한 권한을 감독이 가져가려는 성향이 강한 만큼 테크니컬 디렉터가 허수아비 행정가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결국 축구인들에게 자리 하나 더 만들어주는 것 밖에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박태하 위원장은 "그런 우려를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잘 쓴다면 분명 팀에 큰 도움이 된다. 테크니컬 디렉터를 잘 활용하는 케이스를 더 부각시키고, 그런 구단이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운영으로 성과를 낸다면 생각은 바뀔 것이다"라는 자신의 의견을 냈다. 

최근 이적시장에서도 테크니컬 디렉터, 그리고 거기에 준하는 전력강화실장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실제로 경영진, 디렉터, 감독의 판단과 실행으로 이어지는 3박자가 맞을 경우 어려워 보이는 선수 영입이 잘 풀리는 케이스가 나타나는 중이다. 



현재 이런 구도가 잘 이뤄지는 대표적인 팀이 인천유나이티드다. 인천은 전달수 대표이사가 현장에 있는 조성환 감독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화답하고, 임중용 전력강화실장이 빠르게 액션을 취하며 지난 2년 간 성공적인 이적시장을 보냈다. 이명주, 에르난데스가 중요한 타이밍에 오며 지난해 팀 창단 후 처음 AFC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따냈다.

이번 겨울에도 음포쿠, 제르소, 신진호 같은 굵직한 영입이 성사됐다. 음포쿠와 제르소가 테크니컬 디렉터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음포쿠의 경우 지난해 9월 인천과 처음 접촉했는데, 당시 조성환 감독은 파이널A 진입과 챔피언스리그 출전권 획득을 위한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선수 영입에 힘을 쓸 여유가 없었다. 음포쿠의 영상과 이력을 확인한 뒤 구단에 영입을 요청했고, 임중용 실장은 선수의 기량과 캐릭터에 대한 추가적인 점검 후 일사천리로 영입을 마무리했다. 

제르소는 제주와의 재계약 협상 결렬 후 발 빠르게 추진했다. 경쟁자가 있었지만, 임중용 실장이 혜안을 마련했다. 인천의 연봉 조건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는 제르소에게 3년이 아닌 4년 장기 계약을 제시했고 직접 장문의 레터를 보내 구단의 계획을 공유했다. 결국 선수의 마음이 움직이며 현재 K리그를 대표하는 크랙을 데려올 수 있었다. 

새로운 선수 영입 외에도 이명주, 델브리지, 김보섭, 김동민 등 주축 선수들의 재계약도 꼼꼼하게 챙겼다. 인천은 향후 3년가량 양질의 스쿼드를 보유한 상태로 꾸준히 챔피언스리그 출전을 노릴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됐다.

박지성 테크니컬 디렉터가 있는 전북현대도 인상적인 결과물이 있었다. 바로 정태욱이다. 김상식 감독 부임 후 줄곧 원했던 선수였지만 전 소속팀인 대구FC는 팔지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만 유지했다. 이번 겨울 이적시장 초반에도 대구는 계약이 2년이나 남은 정태욱의 이적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웠던 영입은 박지성 디렉터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풀렸다. 지난해 대구FC 원정 당시 조광래 사장과의 미팅에서 시작된 정태욱 이적 요청은 이번 겨울까지 이어졌다. 총 3번에 걸친 삼고초려 끝에 조광래 사장은 정태욱에 대한 전북과의 협상을 허락했다. 이적료로 인한 줄다리기도 잠시 있었지만, 그 부분 역시 박지성 디렉터가 매끄럽게 중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북은 지난 9월 박지성 테크니컬 어드바이저를 디렉터로 임명하며 명확한 책임과 권한을 갖게 했다. 김상식 감독도 이번 겨울이적시장부터 선수 영입 과정에서 스스로 한발 물러서고 박지성 디렉터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는 모습이다. 불발된 영입도 있지만, 박지성 디렉터가 물꼬를 트며 관계를 이어가는 대상이 있어 향후 전북에 필요한 보강은 꾸준히 이뤄질 전망이다. 

부산아이파크도 박동우 전력강화실장의 역할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21년 초 공개 채용을 통해 부산에 입성한 박동우 실장은 제주 강화부장 시절 로페즈, 자일, 페드로, 산토스, 마그노 등 브라질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탁월한 능력으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페레스 감독 사임 후 새로 취임한 박진섭 감독과 지난 여름부터 본격적인 호흡을 맞추며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

박진섭 감독은 "박동우 실장님이 상당한 의지가 된다. 선수 영입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부산은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번 겨울 최지묵, 최건주 같은 알짜 선수를 영입했다. 지난 시즌 부임해 박진섭 감독이 고민하던 포지션에 젊고 에너지 넘치는 선수들이 온 것이다. 외국인 선수도 기존의 라마스에 새롭게 페신만 합류한 상태다. 타깃형 공격수를 추진하고 있었지만 자금적인 부분으로 여의치 않았다. 이 부분도 박동우 실장이 지난해 후반기 브라질에서 체크하고 온 리스트를 기반으로 마지막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대전하나시티즌과 강원FC도 이런 흐름에 편승했다. 대전은 기업구단 인수 직후 전력강화실장을 맡았던 김현태 전 베트남 대표팀 전임 GK 코치를 2년 만에 다시 영입했다. 강원FC는 조영증 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전력강화실장으로 선임하며 전력강화실을 재편했다. 지도자와 행정가들의 경험을 두루 갖춘 베테랑 축구인을 중심으로 선수 스카우트, 유소년 강화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울산현대, 수원삼성, 포항스틸러스 등 전통의 명가들은 이미 유소년 총괄 디렉터까지 갖추며 팀의 주요 경쟁력인 유스 시스템에 힘을 싣는 모습이다.

테크니컬 디렉터가 향후 K리그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현장 지도자의 열린 자세다. 선수 영입은 감독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권한인데 그 부분을 행정 파트로 이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구단과의 관계에서 불신이 생기면 이런 제도를 자신에 대한 견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견제보다는 협력과 공존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박태하 기술위원장의 말대로 테크니컬 디렉터는 팀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인천의 임중용 실장은 "조성환 감독님과 서로 모든 부분을 가감 없이 공유하며 오직 팀의 발전만 꾀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판단이 잘못돼 A팀에 악영향이 가서 감독님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저부터 이 자리를 떠난다는 각오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테크니컬 디렉터의 시대는 K리그에 이미 도래했다. 도입이 확정된 제도에 누가 먼저 연착륙할 것인가. 2026년을 대비해 미리 경쟁력을 준비한다면 그 이후의 리그 판도는 또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사진=인천유나이티드, 한국프로축구연맹,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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